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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주민들 선택, 우리에겐 평화적 통일 희망 줘"
평화문제연구소(이사장 현경대)와 독일 한스자이델재단(서울대표 베른하르트 젤리거)은 지난 9월 26일 그랜드힐튼호텔 그랜드볼룸에서 “독일의 자유민주주의 수호노력과 그 시사점: 슈타지와 방어적 민주주의”를 주제로 제22차 한·독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현재 한국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각 분야에서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에 대한 도전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통일 전 독일도 유사한 경험을 겪은 적이 있다. 이에 대해 서독은 동독 정보기관의 서독 내 활동을 비롯, 극우와 극좌 세력들의 사회혼란 조성에 대해 ‘방어적 민주주의’ 이론으로 자유민주적 기본가치를 보호하고, 나아가 통일을 이루었다. 이와 관련, 이번 심포지엄은 독일이 경험한 사례들을 살펴보면서 한국사회에 주는 시사점과 대안을 마련하는 자리였다.
“동독 슈타지, 서독을 ‘작전지역’으로 명기”
현경대 이사장은 개회사에서 “슈타지 문제는 현재의 통일 독일 국민들에게는 치유되어야 할 상처이지만, 여전히 북한과 체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우리에겐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여 바른 통일을 이룩하는 데 반드시 되살펴봐야 할 살아있는 교훈”이라고 말했다.
베른하르트 젤리거 독일 한스자이델재단 서울사무소장은 환영사를 통해 “비밀경찰의 역할을 한 슈타지가 구동독 주민들에 대한 인권 유린 사례, 구서독에 대한 끊임없는 첩보수집 및 공작으로 자유 민주체제의 전복을 기도한 사례 등에 대해 실증적인 경험담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병석 국회부의장은 축사를 통해 “우리는 통일 전 독일이 동독 비밀첩보기관 ‘슈타지’의 공작은 물론, 극우․극좌 세력들의 혼란 조성에 대해 자유민주적 질서를 흔들림 없이 지켜내고, 마침내 통일을 달성한 과정을 소중한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며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은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기반해서 이뤄내야 하는 인류사적 과업”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롤프 마파엘 주한 독일대사도 “독일의 통일은 갑자기 온 게 아니고, 사실은 1972년부터 추진한 동방정책과, 동·서독 기본조약을 통한 양국 교류 활성화로 밑거름을 마련해 놓은 것”이라고 강조하며, “이 심포지엄이 앞으로 계속 활성화돼 한반도 통일의 밑거름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한편 김천식 통일부 차관은 기조발표에서 “체제 경쟁은 체제 수호 노력을 의미한다. 동서독도 체제의 대결과 경쟁, 수호 노력 속에서 동독주민들이 일치단결해서 서독의 체제를 선택, 최초의 평화적 통일을 만들어 냈다.”고 설명하며 “이것은 우리에게 평화통일의 희망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분단은 우리 민족 발전의 족쇄이자 우리의 아픈 상처”이므로 “남북한 주민들이 통일에 강한 의지를 바탕으로 자주적으로 완성해야 한다.”고 밝히고 “정부뿐만 아니라 국민의 통일염원과 의지를 바탕으로 통일준비 노력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심포지엄에는 슈타지 전문가 2명이 발표에 나섰다. 제1회의 발표자인 후베르투스 크나베(Dr. Hbertus Knabe) 박사는 현재 독일 호엔쉔하우젠 슈타지기념관(슈타지 중앙구치소 기념관)의 관장으로 독일 슈타지문서관리청 연구위원을 역임했다. 슈타지 관련연구로 독일정부 공로십자훈장까지 수훈한 크나베 박사는 동독 슈타지의 암울했던 역사에 대한 생생한 증언과 이를 바탕으로 한국이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유사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슈타지, 서독에도 촘촘한 감시망 구축
다음은 크나베 박사의 ‘동독 슈타지의 대 서독사회 영향력 실태’라는 주제의 발표문을 요약‧정리한 것이다. 국가보위부(MfS: Ministeriums für Staatssicherheit, 슈타지)의 활동은 사회주의통일당(SED: 구동독 공산당) 독재체제 붕괴 이후 처음에는 동독인들의 문제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국가보위부의 활동은 사실 상당 부분 서독을 겨냥하고 있었다. 슈타지는 서독에도 촘촘한 감시망을 구축해 놓고 모든 종류의 사회주의통일당 비판자들을 ‘감시하고’, ‘와해시키고’ 또는 심지어는 구금할 목적으로 동독으로 납치하기까지 하였다.
동독 슈타지는 서독에서도 ‘당의 방패와 칼’로서 사회주의통일당의 권력을 지키고 공고히 하는 과제들을 수행하였으며, 이를 위해 수 천명의 비공식 정보원들(IM)을 모집하였다. 동독의 국가보위부가 내부적으로 독일연방공화국을 ‘작전지역’으로 표시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국가보위부의 입장에서는 사회주의통일당에 대한 서독의 협상지위에 관한 정찰 및 영향력 행사 이외에 증가하는 동서독 관계로 인한 동독에 대한 서독의 정치, 경제 및 이념적인 ‘침투’를 저지하는 것이 주요 관심사였으며, 이 기관은 그 밖에도 ‘적극적인 방안들’을 통해 서독에서 동독에 우호적인 세력들을 조직적으로 확대시키고 독일연방공화국 내에서의 독일민주공화국 비판 움직임들을 약화시키는 과제를 부여 받았다. 1980년대 들어 독일민주공화국의 정치적, 경제적 몰락 징후가 분명해 질수록 서독에 대한 정보 측면의 침투노력은 증가하였다.
서독으로부터의 광범위한 정보 수집은 큰 영향을 미쳤다. 산업 스파이 활동의 결과는 독일민주공화국 경제에 수십 억 마르크의 ‘비용절감효과’를 가져온 동시에 1980년대 동독의 붕괴시점을 수 년 간 연장시키는 효과로 연결되었으며, 군사 첩보활동으로 인해 전쟁이 발발할 경우에 서독은 극도의 타격을 입게 되었고, 정치 및 사회분야 관련 정보들을 통해 사람과 기관, 제도 등에 조직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바탕이 형성되었다.
‘작전지역’ 내 활동의 목적은, ‘당의 방패와 칼’로서의 국가보위부의 당위성에 충실하게, 정보공작 수단을 동원하여 ‘계급투쟁’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전체 서독의 역사에 있어서 슈타지는 정당, 협회, 언론, 운동, 기타 사회기관 등에서 부가적으로 음모를 꾀하는 세력으로서 언제나 존재하였고, 비공식 정보원이나 중앙에서 조종하는 ‘행위들’을 통하거나 아니면 ‘적극적인 방안들’을 통해 사회주의통일당의 의도에 부합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이 때 그들이 지닌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는 의도적인 명예훼손이나 정치적 ‘반대세력’의 동요 유발, 불화와 갈등의 조장 그리고 비공식 정보원 네트워크를 통해 국가보위부가 지시한 정치적, 전술적 ‘노선’의 조직적 지원을 들 수 있다.
독일민주공화국의 슈타지에 관한 학술적, 정치적 청산은 커다란 저항에 부딪혔는데, 서독에서는 사회주의 통일당의 비밀경찰에 대항하여 시민운동이 발생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서독사회가 동독에서 발생한 혁명적 변화로부터 전혀 감정의 동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치 시절의 과오는 정치 및 사회 분야에서 중요한 주제인 반면에 공산주의 독재에 협력하거나 침묵함으로써 그것을 인정했던 것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려고 한다. 동독시절과 마찬가지로 국가보위부의 정보원이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상이한 정치적 낙원으로 정당화하려 했으며, 자신들이 작성했던 보고서와 참석했던 모임에서 단지 작고 사소한 것들만 전달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해를 끼친 적’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군대와 같이 조직된 커다란 기계장치의 협력자로서 그리고 명령 수행자로서 기능하면서, ‘상대방’을 무자비하게 파괴시킬 의사와 능력을 가졌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서독 국내정치 요인 중 하나
또한 만프레드 빌케(Dr. Manfred Wilke) 베를린대 SED연구센터 대표 역시 공산독재체제의 유산이었던 슈타지 자료 관리의 중요성과 역사적 교훈에 대해 실증적인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다음은 빌케 교수의 ‘분단 시절 공산주의에 대한 서독의 민주주의 수호노력과 그것이 통일에 미친 영향’이라는 주제의 발표문을 요약‧정리한 것이다. 분단 40년 동안 서독에서는 동서독 관계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일어났다. 동서독 간 정치질서 상에 존재하였던 대립관계의 근거가 되는 세 가지의 중요한 동서독 간 체제경쟁 갈등 국면에서 서독은 항상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견지하였으며, 서방연합에 확고하게 의지하였다. 상기 갈등상황은 중부유럽 전역에 해당되었기 때문에 국제정치 차원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사회주의통일당은 분단시절 서독 국내정치에 있어서 하나의 정치적 요인이기도 했다.
다음 세 가지의 사례를 통해 사회주의통일당이 서독의 국내정치에 정치적으로 개입한 상황에 대해 분석해 보도록 하겠다. 먼저, 1950년 이후 서독의 재무장과 나토 가입을 저지하려는 동독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으며, 이로 인해 서독 내 독일공산당(KPD)의 활동이 금지되었다. 서독에서의 민주주의 정당들과 공산주의자들 간에 전개되었던 공개적인 권력다툼은 1950년대 초 서독의 서방동맹 및 재무장을 둘러싼 갈등이었으며, 이는 이후 전개되었던 동서독 간의 체제대결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동독과 서독의 공산주의자들은 서독의 서방동맹정책에 대해 매우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반응하였다. 서독연방정부는 독일공산당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독일공산당 청소년 조직의 활동 금지, 정치관련 형법 강화 및 위헌정당으로서의 독일공산당 활동금지를 위한 헌법재판소 위헌소송 제기로 대응하였다. 4년여 에 걸친 위헌심사 이후에 최종판결이 내려졌다. 1956년에 독일 공산당은 활동이 금지되었다.
다음으로 사회주의통일당은 1956년부터 1969년까지 서독의 동독 승인과 서독 내 독일 공산당(KPD)의 합법성 쟁취를 위해 진력하였다. 공산당에 대한 재승인 과정은 두 단계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이는 서독의 정치적 분위기를 어느 정도 변화시켰다. 결과적으로 사회주의통일당은 두 가지 목표를 상당 부분 달성한 셈이다.
사회주의통일당은 독일민주공화국의 국가로서의 승인 목표 달성과 향후 동서독 간의 정책을 위해서 독일연방공화국 내에서 합법적으로 자신의 이해관계를 대표할 조직이 필요했다. 하지만 후신독일공산당(DKP)이 1989년까지 서독 총선과 주 선거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후신독일공산당(DKP)이 독일연방공화국 정치사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고 잘못 판단하기 쉽다. 그러나 후신독일공산당(DKP)은 의회 밖의 저항운동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며, 가장 큰 성과는 1979년부터 1983년 사이에 전개되었던 나토(NATO)의 이중결의에 대한 반대운동이었다.
“동독 주민들 앞에 항복하면 경제지원 하겠다”
사회주의통일당이 미국 중거리 미사일의 서독 내 배치를 방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전개한 이 과정을 공산주의자들은 전술적으로 커다란 정치적 성공으로 평가하였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동원된 의회 밖에서 치러진 ‘평화운동’에서 공산주의자들은 동등한 정치적 세력으로 인정받았으며, 이 과정에서 주요 핵심기능을 담당하였다. 공산주의자들과의 경계선을 긋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반공(反共)’이 서독에서 타격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술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평화운동’은 사실상 실패로 끝났으며, 서독 연방의회는 미국 중거리 미사일 배치를 가결하였다. 이로써 서독은 나토 안에서 미국의 신의 있는 동맹국으로서 활동하게 되었으며 유럽 내에서 소련에게 유리하게 권력관계가 바뀌는 것을 저지하였다.
1989년 가을 서독 연방정부는 분단국가에서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간의 체제갈등이 민주주의에 유리한 방향으로 결정되는 기로에 서있었다. 독일민주공화국으로부터의 대량탈출과 내부에서의 대규모 시위는 사회주의통일당 독재의 위기를 초래하였다. 1989년 11월 8일 ‘분단독일의 상황에 관한 보고’라는 제목으로 행한 연방의회 연설에서 콜 총리는 사회주의통일당이 동독 주민들 앞에 항복을 한다면 경제적인 지원을 하겠다는 연계제안을 하였다.
콜 총리는 동독주민들의 ‘자유를 향한 의지’를 찬양하면서 그것이 가지는 국제정치적 의미를 강조하였다. 1년 후에 독일은 통일되었다. 민주주의 중심국가인 독일연방공화국은 공산주의 독재국가였던 독일민주공화국과의 체제경쟁에서 승리하였다.
한편 빌케 교수는 이번 심포지엄을 계기로 공동연구 발표논문을 한국어로 번역한 <동독 슈타지의 침투 그리고 서독의 방어> 출간 기념으로 심포지엄 현장에서 저자 사인회도 가졌다. 이날 심포지엄에는 독일 및 한국측 전문가, 대학생 등 200여 명이 참석해 많은 관심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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